바야흐로 SPA의 시대다. ZARA, H & M, 포에버21, 에이랜드, 망고, 스파오(SPAO), 유니클로, 미쏘, 르샵, 스파이시칼라, 갭, 파파야…. 현재 국내에 론칭해 있는 브랜드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SPA란 디자인, 생산, 유통이 한 회사에서 이루어져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보다 다양한 디자인을 공급하는 형태를 말한다. 기존 패션 업계의 관행(계절의 주기에 따라 디자인을 내놓는 '시즌' 개념, 트렌드의 즉각적인 유행을 반영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중간 유통 시스템에 의한 높은 가격)을 산산조각 내면서 단박에 패션 시장을 주름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브랜드가 이러한 장점만으로 성공에 이른 것일까? 그 면면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소소한 디테일들이 뒤섞여 있다. 이것이 SPA브랜드를 새로운 쇼핑문화의 원동력일 것이다.

일단 명동의 H & M에 들어가볼까? 강남역에 뉴욕제과가 있다면 명동에선 H & M 앞이 약속장소로 제격이다. 너무 일찍 나왔나, 약속시간까지 무려 1시간이나 남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 중심가라면 어디든 위치한 SPA브랜드 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막말로 2시간 동안 매장을 뱅글뱅글 돌아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마디로 '킬링타임'이 가능한 것이다. 구경도 하고 옷도 입어보고, 그날의 코디에서 부족한 점을 채우기도 한다. 어떤 이는 시간 가는지 모르고 이것저것 다 입어보다가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있다는 후문. 백화점이나 영세한 보세 매장에서는 눈치가 보여서라도 절대로 못할 일이다.

눈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옷가게에서 눈치가 보이는 건 모두 직원 때문이다. 내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지켜보는 직원의 눈빛은 부담스럽다. "어떤 옷 찾으세요?" 하고 물으면 왠지 주눅 들어서는 "그냥… 보려고요…"라고 답하고 만다. 직원의 기세에 밀려 카드를 꺼낸다. 그냥 나올라치면 뒤통수가 따갑다. 그러나 SPA브랜드 직원들은 손님이 질문하지 않는 이상 따라붙지 않는다. 마음 편한 쇼핑이 가능하다. 일반 숍이라면 하다못해 옷걸이에서 옷을 떨어뜨리더라도 직원이 저쪽에서부터 맹렬히 달려올 텐데, SPA 숍에서는 손님은 손님, 직원은 직원! 손님이 자리를 뜨면 어느 새 나타나 조용히 정리한다. 손님이 죄책감 들지 않게 해준다는 것, 정말 작지만 그 어떤 숍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디테일이다.

SPA 브랜드 마니아들이 가장 큰 장점으로 손꼽는 건 바로 피팅이 자유롭다는 것! 막말로 하루에 30벌이라도 입어볼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수량을 입어보고 단 한 벌도 사지 않고 나오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의류 매장 중 SPA 브랜드 매장에서만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쇼퍼백은 대형 마트의 쇼핑카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저것 집어넣었다가 사지 않을 것은 계산대에서 빼면 된다. 실제로 SPA 이용자들은 쇼퍼백에 원하는 옷을 계속 담아두었다가 피팅 후 구매 결정을 내린다. 입어보니 별로인 옷은? 피팅룸 입구에 대기 중인 직원에게 한 아름 안기면 끝. 그 직원은 번호표 주려고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옷 정리하려고 서 있는 사람이다.


SPA 패션 시장을 뒤집어 엎다

기존 패션 시장이 고수해왔던 고정관념은 시즌, 사이즈, 연령대, 그리고 스타일이었다. 여름엔 수영복 팔고 겨울엔 코트 파는 게 당연하고, 평균 사이즈보다 작거나 큰 사람은 다이어트 혹은 수선 요망, 브랜드든 보세든 메인 타깃의 연령대가 있어야하며, 특유의 스타일을 집중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SOUP은 결혼식 하객 룩, FUBU는 힙합 룩… 이런 고정된 스타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이 SPA 브랜드 매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즌? 겨울에도 여름 티셔츠 판다. 사실 땅덩이가 큰 나라에서 시작된 브랜드가 많다보니 우리나라처럼 패션시장이 사계절로 뚜렷하게 구분되어있지 않은 것. 그래서 휴가나 여행 등 급하게 현지 환경에 맞는 옷을 구입할 때 좋다. 특히 서양권 SPA 브랜드에서는 휴양지에 어울릴만한 의상이 많으니 해외여행을 갈 계획인 사람들에겐 필수코스.

또한 '평균'이 아니라도 부끄럽지 않다. 키가 작은 사람, 체구가 작은 사람, 덩치가 큰 사람들이 사이즈에 굴복하여 스타일을 제한받을 필요가 없다. 체형의 격차가 굉장히 큰 외국인들의 실정에 맞게 사이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으니까 말이다. 나이 역시 무제한이다. 2층은 영캐주얼, 3층은 숙녀복, 4층은 부인복으로 나뉘는 백화점이나 확실하게 타깃을 잡고 시작하는 쇼핑몰과는 달리 SPA 브랜드는 전 세대를 아우른다. 그래서 모녀가 함께 찾아와 서로 입어보고 지적하고 칭찬하다가 한 무더기 사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브랜드가 추구하는 룩이 '없다'. 다시 말해 모든 룩이 다 있다. 정장파와 캐주얼파가 함께 쇼핑할 수 있으니 여자들을 은근히 괴롭히던 취향 다른 쇼핑 메이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SPA 브랜드의 자랑거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브랜드 매장이나 로드숍들은 가방, 액세서리 등이 그저 구색 맞추기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 디스플레이용인 경우도 많고 제품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SPA 매장에 들어서면 가방, 구두, 스카프, 액세서리, 심지어 속옷과 파우치까지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다.

패션 전문가들은 SPA 브랜드가 한국 사람들의 패션지수를 높였다고 평가한다. 다양한 디자인과 소품을 아우르고, 무제한으로 입어볼 수 있으니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거나, 트렌디한 아이템을 착용해보는 실전 연습이 가능하다. 옷 잘 입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은 '많이 입어봐라'다. 그러나 그들처럼 옷에 돈을 퍼붓기엔 딸린 식구도 많고, 우리 집은 앵겔지수도 높단 말이다! 지갑 얇고 패션 욕심은 많은 이들에게 SPA 매장은 공짜로 패션공부를 할 수 있는 자기주도적 학습 공간이다.


SPA 앞뒤 처리가 깔끔하다

제품 회전율이 빠르다고 매주 숍에 들를 수는 없는 일. SPA 브랜드들은 온라인 사이트를 제대로 운영해 브랜드 사이트를 방문하면 새로 나온 아이템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물건을 미리 봐두면 넓은 매장에서 체력을 소비하지 않고 남들이 사가기 전에 구입할 수 있다. 사이트에 나온 특정 제품을 사기로 마음먹었다면 자주 가는 매장에 전화해 그 제품이 입고됐는지 확인하면 헛걸음할 일도 없다. 포에버21의 경우 온라인 쇼핑도 가능하다.

'new arrival'이 가면 'season off'가 와야 한다. 그러나 백화점의 파격 세일도 인터넷 쇼핑몰의 막바지 할인도 SPA를 따라가지 못한다. SPA 숍들의 할인율은 그야말로 가격을 '후려치는' 수준으로, 몇 장 남지 않은 아이템은 기존 가격의 20% 수준에 건질 수 있다. ZARA의 경우 SPA 브랜드 중 가격대가 높은 편이라 이 가격이면 백화점에 가겠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세일 기간의 ZARA 매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SPA 브랜드의 뒤처리는 그 어느 브랜드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다. 트집도 없고, 차가운 시선도 없다. 처리 절차도 간단하다. 결제 즉시 절대 교환하러 오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 직원들은 찾아볼 수 없다. 트렌디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한 여성의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H & M에서 나온 꽃무늬 점프 수트를 이효리가 입고 나와 화제가 됐는데, 그 옷은 품절되고 같은 디자인으로 검은색에 금색 허리띠로 리뉴얼되어 나왔더라고요. 다른 매장에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 총 4번을 입어보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사왔어요. 그런데 '사무라이' 소리 듣고 반품! 그 긴 절차 동안 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물론 세일 기간은 주의! 교환 기한이 짧고, 환불은 늘 그렇듯 불가다.)

SPA 브랜드도 조심해라

다른 매장들이 별것 아닌 '디테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SPA 브랜드 매장은 오히려 전면에 내세워 거대한 장점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소비자가 SPA 브랜드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기준 사이즈 표시를 이해하지 못해 늘 헷갈리는 점도 떠오르는 불만사항이다. (H & M의 경우는 매장 곳곳에 한국 사이즈 비교표를 배치해두었다.) 특히 퀄리티를 말하자면 그야말로 '패스트 패션'의 선구자답다. 그러나 3만5천원짜리 코트에서 40만원짜리 품질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SPA 브랜드 중 가격 대비 질적으로 인정받는 브랜드는 유니클로가 유일하다.)

SPA 브랜드의 특별함은 '이미지'도 한몫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고가 박힌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도 SPA 브랜드를 입는 사람이 오히려 트렌디해 보이고 심지어 젊어 보이며, 개념 있어 보이는 것이 요즘 세태다. 이미지의 힘은 너무나 강하다. 즉, SPA라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갭의 경우 너무 베이식한 디자인에 비해 가격은 생각보다 비싼 편이고, 또 이 계열은 아직 유니클로가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기 어렵다. 포에버21과 유니클로를 즐겨 찾는 지인 왈, "사람들이 갭에서 사려는 건 GAP이라 쓰여 있는 후드 티 하나 정도"란다. 유니클로도 안심하긴 이르다. 우익 기업(일본의 극우파 후원)이라는 얘기가 돌면서 근래에 치명타를 입었다. 작은 힘으로 거대한 브랜드도 휘청거릴 수 있다.


인터넷 쇼핑몰, '저렴이'를 넘어서다

인터넷 쇼핑몰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저렴하다'가 인터넷 숍의 장점으로 손꼽혔다. 오프라인 매장의 임대료 및 부대비용이 나가지 않으니 오프라인 보세 매장보다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소비자들도 만만치 않다. 싸다고 무조건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쇼핑몰들은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니라 '옷 못 입는 사람'을 타깃으로 삼는다. 솔직히 상의와 하의를 매치하는 것조차 복잡해하는 사람에게 피팅도 못하고 정확한 사이즈도 알 길 없는 인터넷 쇼핑은 위험부담이 크다. 옷 못 입는 사람들은 매장의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싹 걷어서 구입한다고 하지 않나. 마우스 클릭마저도 귀찮은 이들을 위해 잘나가는 쇼핑몰들이 추가한 게 바로 '세트 쇼핑' 기능이다.

SPA 브랜드가 다양성을 무기로 삼은 반면, 인터넷 쇼핑몰은 반대다. 아무 스타일이나 되는 대로 파는 건 좋지 않다. 럭셔리한 섹시 스타일, 페미닌한 구제 스타일 등 쇼핑몰이 미는 특정 스타일이 있다. 요즘은 패션 피플들의 수도 많고 그들이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평상복으로 입기 난감한 스타일만 아니라면 대중적인 마니아들이 몰리면서 쇼핑몰이 뜨는 것. '스타일 난다'가 대표적인 예다.

온라인 쇼핑몰 경쟁이 심화되고, 소비자들의 격렬한(?) 후기가 등장하면서 쇼핑몰 운영자들의 고민도 커졌다. 불만족스럽다는 내용을 지우면 고객이 분노하고, 후기 게시판이 칭찬 일색이면 의심부터 한다. 그래서 괜찮은 쇼핑몰들은 단점을 얘기하는 후기도 가만히 두고, '착한' 댓글을 다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대처한다. 단점이 군데군데 있을 때 칭찬도 진실로 보이는 법이다.

사실 온라인 쇼핑몰들이 '저렴이'라는 장점이자 단점인 특징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소비자들은 그것이 온라인 쇼핑몰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면 까다로운 소비자들은 이렇게 말하며 돌아선다. "뭔가 고급스럽지 않아서 별로." 그래서 이들은 이중 전략을 취한다. 자체 제작(브랜드 디자인 카피가 아니라 쇼핑몰 내부 디자이너의 디자인 및 자체 생산) 제품은 약간 비싸게(그래도 백화점 브랜드보다는 저렴하다!) 팔고, 기본 아이템을 싸게 팔아치우는 것이다. 또한 잘나가는 쇼핑몰일수록 기대 이상의 좋은 소재를 사용하는데, 이는 부익부 빈익빈이다. 매출이 높아야 대량 판매가 가능하고, 그래야 좋은 소재를 떼서 박리다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SPA 브랜드가 매장에서 손님을 '방목'한다면 온라인 쇼핑몰은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는 점도 남다르다. 매출이 높은 쇼핑몰들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보이는데, 바로 홈페이지가 마치 '블로그' 같다는 것! 외국의 감성적인 패션 블로그 형태를 곧잘 차용해 홈페이지를 만들고, 카탈로그 촬영 후기, 주인장의 다이어리 등 여러 가지를 공개하며 단골 방문자들을 '팬'으로 만든다. 게시판에 댓글을 다는 운영자조차 판매자가 아닌 블로거를 연상케 한다. 그들에겐 특유의 말투가 있다. 예를 들면 "언니는 말이야 이런 옷을 입는단다~", 반대로 "이쁜 언냐들은 요 새콤달콤한 블라우스를 택하면 좋아요" 식이다. 오프라인 숍에서의 '언니' 호칭이 변화된 격이다.

　

　

진행: 최진주 기자 | 사진: 최재인 | 일러스트: 김옥